안녕하세요 그 시절 서랍속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은 1981년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명동 거리의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사라진 모습과 라디오에선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울려 퍼지던 그해 여름.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영국에선 동화 속 공주님이 탄생했고, 서독 바덴바덴에선 전 국민을 울린 승전보가 들려왔죠. 오늘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40여 년 전, 그 찬란했던 현장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사회 & 풍경

81년의 대한민국은 단순히 연도가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시각적·문화적 '빅뱅'이 일어났던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80년 12월 1일 첫 컬러 방송이 시작된 후, 1981년은 일반 가정에 컬러 TV가 급속도로 보급된 원년이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의 소비 패턴도 변했습니다. 화려한 색상의 의류와 화장품 매출이 폭발했습니다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이어진 대규모 문화축제 '국풍 81'의 여운이 7월까지 이어지며,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나 '바람 바람 바람' 같은 곡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대학가요제 열풍과 맞물려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거리의 모습은 규제로부터 해방된 욕구가 패션으로 표출되던 시기였습니다.
말 그림이 그려진 조다쉬(Jordache)나 뱅뱅(Bang Bang) 같은 브랜드 청바지는 당시 청소년들에게 부의 상징이자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습니다. 꽉 끼는 바지에 셔츠를 넣어 입는 스타일이 유행했었죠.

박정희 정권의 상징이었던 거리 장발단속, 미니스커트 길이 측정이 완화되면서 청년 문화는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소니(Sony)에서 시작된 워크맨 열풍은 길거리에서 나만의 음악을 듣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고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극화 만화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아지트는 단연 롤러스케이트장이었습니다. 신나는 디스코 음악과 사이키 조명 아래서 롤러를 타는 것은 당시 가장 힙(Hip)한 놀이였습니다. 롤러장은 단순히 스케이트를 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멋을 뽐내는 런웨이였습니다.
문화 & 연예

1981년은 조용필이 '가왕'으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힌 해였습니다.
81년 7월에 발표된 정규 3집은 그야말로 전설이었습니다. 타이틀 곡'고추잠자리'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와 아방가르드한 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길거리에서 흥얼거렸습니다. 또한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 같은 트로트 감성부터 록까지 한 앨범에 담아 전 세대를 통합하는 라이벌 없는 독주 였습니다.

반면 윤시내의 '열애'가 가진 폭발적인 가창력과 이정희의 '그대여'가 주는 상큼함이 차트에서 각기 다른 매력으로 사랑받았습니다.
가요계를 조용필이 장악하고 있었다면, 다른 분야에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이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전영록과 이문세입니다.

먼저, 당시 여학생들의 책상을 도배했던 주인공, 바로 '영원한 오빠' 전영록입니다. 80년대 초 전영록의 대표 히트곡들이 연이어 사랑받으며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심지어 화려한 무술 액션까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대한민국 청춘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입은 청재킷은 당시 모든 남학생의 워너비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 '발라드의 황제'라는 수식어를 얻기 전, 유쾌한 입담으로 우리 곁을 지키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문세 씨입니다.
이문세는 가수로서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던 유망주였지만, 라디오와 TV에선 이미 '재치 넘치는 MC'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죠. 밤마다 들려오는 그의 낭랑한 목소리는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 최고의 휴식처였습니다.
조용필의 카리스마와 전영록의 세련미, 그리고 이문세의 친근함이 공존했던 1981년의 여름.

당시 거리의 음악다방을 점령한 해외 스타는 단연 '퀸(Queen)'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 '보헤미안 랩소디'로 이미 전설이 된 그들이었지만, 81년 여름의 열기는 더 특별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쓴 'Another One Bites the Dust'의 묵직한 베이스 라인은 당시 한국 청춘들의 심장 박동수마저 바꿔놓았으니까요.


당시 중고등학생들에게 팝송은 동경의 대상이자 공부의 연장이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 들으며 공책에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라고 한글로 발음을 적어 달달 외우곤 했습니다.

81년 여름, 극장가에서는 <007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가 가졌던 위상은 지금의 '어벤져스'급 기대감 그 이상이었습니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 그리스의 절벽 수도원, 설원의 스키 추격전 등 전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총천연색 영상은 당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대리 만족의 절정을 선사했습니다.

당시 제임스 본드였던 로저 무어는 역대 본드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세련된 매력을 뽐냈습니다.
이전의 투박한 액션과 달리, 로저 무어 특유의 여유 넘치는 표정과 최첨단 가젯(특수 장비)을 사용하는 모습은 당시 남성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여성들에게는 '최고의 섹시 가이'였습니다.


특히 노란색 소형차 '시트로엥 2CV'를 타고 좁은 산길을 구르며 도망치는 추격신이나, 까마득한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장면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또한 시나 이스턴(Sheena Easton)이 부른 주제가 'For Your Eyes Only'는 영화만큼이나 유명했습니다.
영화 개봉 전후로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에서는 이 노래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 가수 본인이 직접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파격적인 연출도 당시엔 큰 화제였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당대 최고의 미모와 인기를 누리던 '2세대 트로이카' 시대가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인형 같은 외모의 정윤희, 세련된 지성미의 유지인, 그리고 독보적인 분위기를 가진 장미희까지.

그런데 이 견고한 트로이카의 성벽 사이로,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매력을 가진 신인 한 명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바로 배우 안소영이었습니다.

그녀는 스크린에 등장하자마자 충무로의 모든 시선을 단숨에 뺏어버립니다. 기존 여배우들이 가녀리고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다면, 안소영은 서구적이고 건강미 넘치는 체격, 그리고 당당한 카리스마로 대중을 압도했습니다.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부터 거침없는 연기까지 선보이며, 단숨에 '차세대 섹시 심벌'이자 '최고의 기대주'로 급부상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애마부인>은 바로 이듬해인 82년 초에 개봉하며 전설이 되지만, 그 거대한 열풍의 서막은 이미 81년 여름, 안소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극장가에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예고되고 있었습니다.


극장가가 화려한 외화와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으로 뜨거웠다면, 안방극장은 그야말로 '국민 배우'들의 독무대였습니다.
특히 MBC에서는 배우 최불암 씨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요. <수사반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박 반장으로 범죄를 소탕하다가도, <전원일기>에선 우리 시대의 따뜻한 아버지로 변신하며 안방극장을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물급 배우 사이에서도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한 꼬마 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드라마 <달동네>의 '똑순이' 김민희 양이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낸 이 드라마에서, 야무지게 할 말 다 하는 똑순이의 모습은 지친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똑순이의 영향력은 아이들의 외모까지 바꿔놓았습니다. 귀밑까지 오는 짧고 단정한 단발머리, 일명 '똑순이 머리'는 당시 초등학생 여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유행이었습니다.

실제 이름보다 극 중 배역 이름인 '똑순이'가 더 유명해져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많은 분이 똑순이로 기억하고 계시죠.
해외 & 사건사고

이제 시선을 잠시 해외로 돌려볼까요? 81년 여름, 전 세계의 눈과 귀는 영국의 런던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7월 29일.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인구가 TV 앞에 숨을 죽이고 지켜본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바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혼례였죠.

마차에서 내려 무려 7미터가 넘는 드레스 자락을 끌며 성당으로 향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화 속 공주님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국 뉴스에서도 이 소식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요.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 화려한 영국 왕실의 풍경은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았습니다.

반면 전 세계가 동화 같은 왕실 결혼식에 취해 있을때 낭만의 도시 파리의 한 골목에선, 인류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든 가장 기괴하고 잔혹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사가와 잇세이 파리 인육 사건이었습니다.
6월 13일. 파리 불로뉴 숲에서 두 개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이 발견됩니다. 그 안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여대생의 시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범인은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일본인 청년, 사가와 잇세이였습니다.

수사 결과 밝혀진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네덜란드 여학생을 살해한 뒤, 시신의 일부를 요리해 먹는 '인육 사건'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 먹고 싶었다"는 범인의 엽기적인 진술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81년의 여름은 이토록 눈부시게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잔혹했던 '두 얼굴의 계절'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시선을 국내로 돌려볼까요?
정치 & 스포츠

81년은 전두환 정부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권력을 공고히 다지던 시기이자, 민주화 열망을 억누르기 위한 공안 통치가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정권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 시절의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도 차가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올림픽 유치에 온 나라가 환호할 때, 부산의 어느 지하방에서는 청년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사건, 그리고 평범한 세무 변호사 노무현을 거리의 투사로 바꾼 운명적인 사건. 바로 '부림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9월 부산에서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이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습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공안 당국이 부산 지역의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 길게는 60일 동안 불법 감금되어 구타 물고문 통닭구이와 같은 가옥한 고문을과 강압적인 수사를 당했습니다. 가족들은 행방조차 몰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이때 돈 잘 벌던 세무 변호사 노무현이 운명처럼 이들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고문으로 초췌해진 청년들의 모습, 공포에 질린 눈빛을
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국가냐"라고 외치며 그는 비로소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언론 통제로 인해 일반 시민들은 "빨갱이들이 나라를 뒤엎으려 했다"는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반정부 정서가 깊게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새 시대, 새 역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행정 개편을 단행하는데요. 그 핵심은 바로 7월 1일을 기해 실시된 대구와 인천의 '직할시' 승격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경상북도 대구시, 경기도 인천시로 불리던 두 도시는 이날부터 도(道)의 품을 떠나 정부 직할의 독립된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체제의 기틀이 바로 이때 마련된 것이죠. 대구와 인천 시민들에게는 단순히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지역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 도시로 공인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9월30일 기뿐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독일 바덴바덴. 이날은 향후 대한민국 10년의 운명을 결정지을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투표로 정해지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결과는 뻔해 보였습니다. 이미 2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 나고야의 압승이 예상됐고, 뒤늦게 뛰어든 서울의 판세는 '나고야 60표 대 서울 0표'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절망적이었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개발도상국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시킨 선진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게임을 뒤집기 위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 유치단이 나섰습니다. 일본이 고가의 시계로 로비할 때, 우리 유치단은 매일 아침 IOC 위원들의 숙소에 신선한 꽃바구니를 전달하며 진심으로 다가갔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 사마란치 위원장이 봉투를 열고 "세울(Séoul)"을 외치는 순간, 전 세계는 경악했습니다.
결과는 52 대 27.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대역전극으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는 대한민국 서울로 확정되었습니다.

가난과 전쟁의 이미지를 벗고 전 세계에 우리의 성장을 선포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마운드 위에서는 거대한 전설이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81년 대한민국 야구판을 단숨에 집어삼킨 '무쇠팔', 최동원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이해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그는 말 그대로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실업야구 전기리그 우승은 물론, 코리안시리즈 우승컵까지 팀에 안겨주었죠. 신인왕, 다승왕, 그리고 MVP까지. 1981년의 모든 영광은 오직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로 통했습니다.

그의 위력은 국경을 넘었습니다.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대회. 최동원은 세계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최우수투수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작은 거인에게 경악했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MLB)에서 제안이 날아들듭니다.
그리하여 9월 15일, 최동원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파격적인 조건의 계약을 체결합니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서 시작하는 5년 장기 계약이었죠. 하지만 운명은 그를 한국에 남겨두었습니다. 병역 문제와 새로 출범하는 한국 프로야구의 흥행을 위한 국가적 요청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그의 미국행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가 1981년이 우리에게 응답해 준 소식들이었습니다.
척박한 중동 땅에서 땀 흘려 외화를 벌어오고, 0.1%의 확률을 뚫고 올림픽 유치의 기적을 일궈냈던 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뜨거운 교훈을 건넵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1981년의 열정처럼, 여러분께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시절 서랍속 이야기
Make life fun 세월의 먼지가 쌓인 서랍을 열듯, 잊혀진 그 시절의 뉴스들을 하나하나 꺼내봅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그때 그 시절의 숨겨진 여러분의 추억을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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