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979년을 시작으로 한이유는 제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고 18년간 이어진 권위주의 통치가 무너지고, 짧은 희망 뒤에 다시 군부 독재가 들어서는 '격변의 2년'을 기록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1979년 2월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후반기로, 한국 사회가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변화 속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라디오에서, 알 수 없는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우선 남북 관계과 큰 이슈였는데요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위원장이 조절위 재개 및 직통전화 개통을 촉구했습니다
이호락 당시 서울측 조절위 위원장은
“남북조절위원회는 언제든 재개할 수 있으며 남북 간 직통전화 개통도 가능하다"
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는 북한이 대화에 응할 경우 남북 간 소통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월 1일 0시를 기해 대남 비방 선전 및 행사를 중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신문, 방송, 유인물, 대남방송 등 모든 대남 선전 활동을 멈추겠다는 의미였어요.
하지만 남북조절위 양측은 기구 확대 및 통일 준비 위원회 안건으로 의견 대립을 보였습니다.
남측 입장은
남북조절위원회를 점진적·실무적 협의 기구로 유지하되
남북 간 신뢰 회복 후 단계적 논의를 이어가자는 태도였으나
북측 입장은
남북조절위원회를 단순한 조율 기구로 두지 않고, 통일을 직접 준비하는 위원회로 성격을 강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즉, “기구 확대”를 요구하며, 조절위를 사실상 남북 연합기구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이었습니다.
성장의 빛과 그림자, 경제 및 사회 이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물가 상승 입니다.
전국 도매 물가지수가 2.3%, 소비자 물가가 3.1% 상승했다고 경제기획원이 발표했습니다.
즉, 생산·유통 단계의 가격뿐만 아니라 실제 소비자 생활비 부담이 동시에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가장큰 원인으로는
1978년 말부터 국제 원유 가격이 불안정했고, 곡물·비철금속 등 원자재 수입 단가가 올라 물가에 압박을 주었으며
겨울철 채소류·축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소비자 물가에 직접 반영하였습니다.
또한 정부가 일부 전기료·교통 요금을 조정하면서 생활물가가 전반적으로 뛰었는데요.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아던 우리나라는 전력 생산비나 교통 운송비가 자연스럽게 증가 한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물가 시대는 말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닌것 같습니다.

다음은 고리 원전 1호기 가동 중단 입니다.
1979년 2월, 기계적 결함과 안전 문제로 인해 발전소 가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원자로 냉각계통의 이상 신호와 일부 안전 장치 오작동이 원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력 생산이 중단되고, 지역 전력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죠.
당시 정부와 한전은 “안전을 위한 예방적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국내 첫 원전의 안정성”에 대한 사회적 의구심이 커졌습니다.
언론에서도 “과연 원자력 발전이 안전한가?”라는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화재에서는 큰 이슈가 있었습니다.
서울 후암동 판자촌에 큰불이 나 150여 동이 전소하고 85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발생 시각은 1979년 2월 중순 새벽 무렵 이었으며
피해는
수백 채의 판잣집이 불에 탔고 수천명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확한 사망·부상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큰 인명 피해와 더불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당국 발표에 따르 원인은 연탄불 취급 부주의로 인한 화재 가능성이 컸습니다.
당시 판자촌은 전기·가스 시설이 열악하고, 소방 인프라가 거의 없어 불이 나면 대형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한겨울에 대피소 생활을 하며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정부는 긴급 구호와 임시 수용 대책을 내놨지만, 근본적인 도시 빈민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전화기 가설난 즉, 전화기 공급 부족’ 문제 입니다.
전화기 가설난은 1979년 사회면을 장식한 대표적인 생활 뉴스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은 경제성장과 함께 전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당시 전기통신공사(현 KT)의 시설·설비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전화기를 신청하고도 수년 동안 개통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전화 가설난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 도시도 심각했습니다.
당시 통계로는 서울이 약 14만 건, 부산 약 7만9천 건, 인천 약 5만5천 건 등 전국에서 40만여 건의 설치 지연 적체가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은 빨랐지만, 생활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한 사회적 불균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YH무역 여공들의 해고와 노동운동 여파
수출 드라이브의 이면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습니다.
YH무역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수출 전문 봉제업체였습니다.
주로 10~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전형적인 수출 봉제 산업 회사였죠.
1979년 2월,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을 집단 해고하게 되는데
해고된 여성 노동자들은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집단적으로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에 정권의 강경 대응은 사회적 분노를 키웠고, 이는 한국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긴장감이 높았습니다.
2월, 김영삼, 김대중, 윤보선, 양일동.
야권 지도자 4인이 모여 정부 주도하에,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 반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투옥된 구속자 석방, 공민권이 박탈된 야권 지도자들의 권리 회복, 계엄령 해제 등을 합의했습니다.
이는 정권의 권위주의에 맞선 역사적 회합이었고, 민주화의 불씨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중국-베트남 전쟁 발발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북부를 전면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갈등 중이었는데, 베트남은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을 ‘소련의 아시아 대리인’으로 보고 견제에 나선 것입니다.
양측 모두 수만명의 사상자 발생하고
국경 지역 도시와 마을은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중국은
너희가 소련에 기대어도 중국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날렸으나
베트남은
중국군을 막아낸 경험으로 ‘인민군의 강력함’을 과시 하였습니다.

다음은 정말 희귀 기상 현상 관련 뉴스 입니다.
바로 사하라 사막에 눈이 내린 사건입니다.
1979년 2월 18일 전후, 북아프리카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 일대에서 기록적인 폭설 발생하였는데
적설량이 약 30cm에 달해, 세계 최대의 건조지대인 사하라 사막이 순식간에 눈으로 뒤덮인 장관을 이뤘습니다.
이 지역은 평소 기온이 낮에는 50도 가까이 오르기도 하고, 강수량은 연간 25mm 수준으로 눈은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상이변이었죠.
원인은
당시 북극발 한랭 기단이 지중해를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밀려 내려오면서
알제리와 모로코 내륙 고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한파와 함께 폭설을 일으킨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이후에도 2016년, 2018년, 2021년, 2022년에 소규모 적설이 기록되었지만,
1979년의 폭설은 규모와 적설량 면에서 최초이자 최대 수준으로 꼽힙니다.
다음은 영화 소식입니다

성룡의 취권이 국내에서 압도적인 흥행을 보였습니다.
취권은 한국에서 1979년 2월 무렵 극장 개봉해 서울에서만 약 89만 명 관객을 동원하며 연간 외화 흥행 1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서울 관객 수 기준, 국산 영화 《12인의 하숙생》이 26만 명으로 방화 1위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4배의 흥행 기록이었습니다.
성룡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일약 대스타가 되었고, 이후 《사형도수》, 《사제출마》 등 그의 홍콩 무협·코미디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 가도를 달렸습니다.
당시 한국 극장가는 한국 영화보다 홍콩 무협·액션 영화의 영향력이 더 컸을 정도로 외화 쏠림 현상이 강했습니다.
저도 성룡 영화를 엄청 좋아 했었는데요. 이소룡의 얼굴 연기보다 성룡의 코믹 연기가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1979년 2월 인기 가요 입니다.
언제쯤을 회상 할때는 노래 만큼 좋은게 없는것 같습니다.
그당시 인기곡으로는
심수봉 – 〈그때 그 사람〉
그때 그 사람은 1978년 말 데뷔곡이자, 1979년 초까지 가장 많이 불린 히트곡.
TV·라디오 순위 프로그램에서 상위권을 차지했고, 신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상징으로 부각 시켰습니다.
장계현 – 〈사랑을 미워해〉
1979년 초 큰 인기를 끈 발라드로
감성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당시 유행하던 ‘순정·비애적 사랑 노래’ 흐름을 대표하는 곡입니다.
혜은이 – 〈진짜 진짜 좋아해〉, 〈파란 나라〉
혜은이는 1970년대 후반 국민적 아이돌 가수였으며
1979년 2월 무렵에도 여전히 방송·라디오에서 상위권 유지하였습니다.
하춘화 – 〈영암 아리랑〉
트로트·민요풍 가요의 인기곡으로
1979년 초반 각종 무대와 라디오에서 자주 울려 퍼졌습니다.
대학가요제 출신 히트곡들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8년 대학가요제 수상곡들이 1979년 초반까지 차트에 머무렀는데요.
샌드페블즈 – 〈나 어떡해〉
해바라기 – 〈사랑으로〉 (초기 버전)
아직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지만 반가운 노래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뉴스 입니다.

2월 무렵 국내에서는 제9회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열렸고, 농구·레슬링·배드민턴 같은 전국 규모 대회가 이어졌습니다.
스포츠에서 가장 큰 이슈는 평양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인데요
4월 25일~5월 7일, 평양에서 개최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남북한 양국 탁구 협회 대표들이 평양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단일팀 구성 협의차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탁구는 이미 1970년대 국제 스포츠 외교의 상징이었고, ‘핑퐁 외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치적 상징성이 컸습니다.
남측에서는 긍정적인 검토 의사를 보였으나, 구체적인 방식(선수 선발, 국기·국가 사용 문제 등)에서 이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사막에 눈이 온것에 한번 놀라고 북한에서도 뭔가를 개최 했다는 것에 두번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1979년 2월 국내와 세계 뉴스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이렇게 혼란과 긴장이 교차하던 시절
그러나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시대의 숨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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